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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신앙 에세이들입니다. 읽으시는 중 하늘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사함이 적으면 사랑도 적다 (눅 7:36-50)
제목 사함이 적으면 사랑도 적다 (눅 7:36-50)
작성자 관리자 (ip:)
  • 작성일 2013-11-08 08:2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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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함이 적으면 사랑도 적다 (눅 7:36-50)

 

   바리새인 시몬이 자기의 집에 예수님 일행을 초대했습니다. 그의 집에서 주님과 제자들이 식사하고 있었을 때 한 여인이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그 여인은 울며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향유병을 열었고 그 안의 향유를 몽땅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눈물과 향유는 뒤섞이어 눈물이 향유인지 향유가 눈물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습니다. 아낌없이 쏟아 부어진 값비싸고 품격 높은 향유의 냄새가 온 방을 채웁니다. 아니 그 풍요한 향기는 방에만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문으로, 창으로 향기는 새어나가고 옆집, 길 건넛집으로 퍼져 나갑니다. 아마 우리의 코 밑에 까지도 말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에게 한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주 예수께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많은 사랑’이라고 부르셨습니다(47). 주 예수께서는 여인의 마음속에서 주 예수님을 향한 큰 경외와 사랑을 보셨습니다. 크고 깊은 사랑을 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주님에 대한 크고 깊은 경외와 사랑이 눈물로, 아낌없이 쏟아 부어진 향유로, 주님의 발을 닦는 머리털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사랑을 기뻐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 죄인을 돕고, 치료하고, 구원하고, 생명 주시기 위해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구주이십니다(빌 2:6-8). 주 예수님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기쁨,’ ‘하늘의 기쁨’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기쁨입니까? 그것은 길잃고 죽어가는 한 마리의 양을 찾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실로 하늘에서 오신 구원자만이 가지실 수 있는 기쁨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와 실패와 약함과 절망의 어둠 속에서 떨며 두려워하는 우리 죄인을 그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복음서들은 주 예수님의 초청이 그야말로 ‘파격적 초청’이었음을 증언합니다. 주 예수님 초청의 특징은 ‘죄인’이든 문둥병자든 세리든 로마군인이든 구별도 차별도 없이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죄인을 구하기 위해 오신 주님에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실제로 하늘나라의 ‘보석’이었습니다.

 

   주 예수의 이러한 ‘파격적 초청’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종교적 질서파괴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정결’과 ‘부정’을 따지면서 ‘부정한 자’는 신적 축복의 대열에서 단호히 제외되어야 한다고 믿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파격적 초청’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그 ‘파격적 초청’으로가 아니면 구원이 될 수 없는 자들을 위한 초청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부정한 자’로 낙인찍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파격적 초청'은 그 초청으로만이 소생할 수 있는 자들에게 ‘생명의 비’와 ‘생명의 빛’과 같은 초청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조소하였습니다(마 11:19). 그러나 구원의 주 예수께서는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친구 되어 주신 죄인들은 주가 친구가 되어주시지 않으면 다르게 살길이 없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요 1:14).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에게서 흘러나오는 ‘충만한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스스로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시어 죄인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주시는 은혜였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죄인이 주의 은혜를 겸손과 감사와 감격으로 받아 죽지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목적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가 되시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빌 2:7). 비가 아무리 쏟아져도 뚜껑을 닫아놓은 항아리에는 빗물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부서지지 않은 단단한 흙에서는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오신 구주께서 분명히 우리 가운데 계셨고 지금도 계신데, 누가 그분에게서 나오는 ‘은혜와 진리(요 1:14)’를 받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까? 닫혀버린 마음, 단단하게 굳어버린 마음의 소유자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부서지고 열린 마음의 소유자가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의 주인이신 구원자 앞에서 여인은 눈물로 자신의 ‘부서진 마음’을 실증하였습니다. 아낌없이 쏟아 부어진 향유로 자신의 구주 예수에 대한 열망과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주의 발을 닦은 머리털로 자신의 ‘낮아진 자세’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시는 주께서 여인의 이 ‘하늘나라적 자세’를 못 보실 수는 없었습니다. 주께서는 정확히 이 여인의 ‘영적 가난’을 보셨고, 그 ‘가난’은 주가 베푸실 은혜의 비를 받을 준비가 갖추어진 자세였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께서 이 여인의 행동을 허용하고 계신 사실에 대하여 의아해 하였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죄인’으로 낙인 찍힌 사람과의 접촉은 사람을 부정하게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시몬이 예수님에 대하여 “어찌 이럴 수가?” 하며 의혹을 품고 있을 때 주께서는 이야기 하나를 해 주셨습니다. 한 주인이 50 데나리온 빚진 자와 500 데나리온 빚진 자 둘 모두를 탕감해 준 이야기를 해 주시면서 주님은 시몬에게 누가 더 주인에게 감사했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시몬은 “많이 탕감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께서는 “네 판단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시몬은 주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했고, 기본적 인사(입맞춤)도 하지 않았고, 감람유도 주를 위해 쓰지 않았지만, 여인은 눈물로 주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향유를 부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모든 사람이 듣도록 소리를 내시어 놀라운 선언을 해 주셨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기독교의 본질을 어떻게 더 핵심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용서의 은혜’를 하늘로부터 받아 ‘새 사람’이 된 자가 그 은혜 감사하여 스스로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이 땅에 없다는 것, 그것을 지금 주께서는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씨에스 루이스(C. S. Lewis)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란 우리가 규칙들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우리는 단순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특별한 종류(sort)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루이스(Lewis)의 통찰은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힘으로 말미암아 ‘새 종류의 인간’으로 지어지는 '새 탄생'임을 강조하셨습니다(요 3:3). 그 '특별한 종류'의 인간을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고 부르며 또 '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엡 4:24). 이처럼 기독교의 중심에는 단순히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을 뛰어넘은 '새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새 사람'의 '새 본질'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그것에 대한 답을 오늘 주고 계십니다. 저 여인에 관하여 주께서 하신 말씀에 주목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지금 하나님께서 심어주시는 '사랑의 능력'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 자신도 ‘사랑의 능력’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주께서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라고 하실 때 이 말씀의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용서’의 필요를 절박하게 느끼지 않는 사람 안에는 ‘사랑의 능력’을 심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상 용서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영혼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팽배한 자만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며 그것을 구하는 사람의 복을 말씀하십시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과 삶 안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능력'을 심어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인의 죄 용서를 선언해 주시면서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을 때 주님이 참으로 하시고자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이 여인은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되었으니 자신도 사랑하는 자가 되어 살게 될 것이라”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이 함축하는 중대한 진리란,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시기 원하는 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산 자’가 되어 자신도 ‘사랑하는 능력’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 받아서

                             향기론 산 제물 주님께 바치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연약한 자에게 힘을 주고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춰

                             성실과 인내로 내 형제 이끌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두려운 마음에 소망주고 슬픔에 싸인 자 위로하며

                              길 잃은 자들을 친절히 이끌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의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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