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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신앙 에세이들입니다. 읽으시는 중 하늘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야곱'이 '이스라엘'로 (창 25:24-34)
제목 '야곱'이 '이스라엘'로 (창 25:24-34)
작성자 관리자 (ip:)
  • 작성일 2013-11-07 01: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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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곱'이 '이스라엘'로 (창 25:24-34)

 

   미국의 한 교회 어른 성경공부 반에서 야곱 이야기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40대 후반의 신도 한 분이 “목사님!” 하며 손을 들고는 말했습니다. “저는 야곱이라는 인간을 싫어합니다. 형을 속인 사람이잖아요. 그렇게 도덕적인 하자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신앙의 모범입니까? 이해가 안 됩니다.” 사실 이 분의 ‘야곱 비판’은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구약 성경은 분명히 야곱을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모범의 인물로 소개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도덕과 윤리의 기준에서 야곱은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릴 인물은 아닙니다. 오히려 형 에서가 도덕 교과서 후보로 뽑힐지 모르겠습니다. 에서는 누구를 속이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냥을 열심히 하여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해 드리던 동네 ‘효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야곱을 꼭 굉장한 사기꾼으로 말하는 것도 옳은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형으로부터 산 행위는 어떻게 보면 형이 무가치하게 여겨 버린 것을 야곱이 '지혜롭게' 취득한 것에 더 가깝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독특한 책입니다. 성경에서 에서가 아닌 야곱이 이스라엘 영적 유산(spiritual heritage)의 주인공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도덕주의자는 “공평하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평범한 도덕책과는 다른 책입니다. 성경의 독특함이란 성경은 ‘하나님의 눈(eyes of God)’과 ‘하나님의 관점’을 나타내고 있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눈’은 인간 문화 안의 도덕과 윤리로는 볼 수 없는 인간의 깊은 곳을 보는 ‘눈’입니다. 그 ‘깊은 곳’은 인간의 ‘영 중심’입니다. 인간의 ‘마음 중심’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라는 말씀대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영의 중심,’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께서 보기를 원하시는 ‘핵심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과 신뢰, 앙모와 목마름이 하나가 되어 타는 열망입니다. 주목할 것은, 정확히 그 ‘열망’이 야곱의 중심에서는 불타고 있었고 에서의 중심에는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에서의 마음속에서 타고 있던 열망의 대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냥’이었습니다. 그는 사냥도구 관리하기, 사냥하기, 아버지 기쁘게 해 드리기 등 여러 ‘할 일’로 마음도 몸도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여러 가지 ‘할 일’과 ‘의무’와 ‘취미’ 등으로 바쁜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바쁜 삶을 살던 에서의 마음 중심에 있지 않던 것 하나,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었습니다. 에서는 하나님을 나름대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라는 이름 앞에서 그는 생(生)과 사(死)의 위기의식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사냥’이라는 열정의 대상 앞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계된 것’은 에서에게 이차적이며 상대적인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을 여실히 증명한 것이 ‘팥죽 사건’입니다. 그는 ‘팥죽 한 그릇’을 급히 먹기 위하여 하나님의 축복과 관련된 ‘장자권’을 집어 내어버렸습니다(창 25:32). ‘장자권’을 무시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일차적 중요성의 대상으로 열망하지 않았다는 것의 증명 그 자체였습니다.

 

   야곱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은 주일학교 때부터 재미있게 듣던 성경 이야기였습니다. 형이 사냥에서 돌아올 시간에 팥죽을 끓여 놓았다가 형이 오자 장자권을 거래한 것, 그리고 팔에 양가죽을 싸매어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이 에서의 팔로 여기도록 하여 축복을 받은 것, 이 모든 이야기는 그야말로 ‘코미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행동을 세상의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요? 아마도 어떤 사람의 눈에는 우스꽝스러운 코미디 이상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돈도 안 되는 ‘장자권’ 때문에 벌인 소득 없는 짓 정도로 보일 것입니다. 또 어떤 도덕주의자의 눈에는 형을 속이는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보이겠지요.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눈’에서, 저 우스꽝스럽기만 한 야곱의 행동은 세상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우스꽝스러운 행동 배후에는 야곱의 ‘영의 움직임’이, ‘영의 진통’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은 다른 것이 아닌 야곱의 마음 중심에 있던 하나님을 향한 열망의 표출이었습니다. 야곱에게 ‘장자권’에 대한 관심은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관심 그 자체였습니다. 야곱이 그토록 우스꽝스러운 짓, ‘미친 짓’을 해 가며 ‘장자권’을 얻으려고 하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으려고 했던 것은, 그만큼 그에게 하나님이 ‘절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에게는 하나님 안의 삶, 하나님과 연결된 삶, 하나님의 힘에 의존하여 사는 삶 외의 다른 삶은 없었습니다. 그의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은 그의 하나님에 대한 필사적이며 절대적인 추구와 의존, 앙모와 사랑의 표현 그 자체였습니다.

 

   성경은 놀라운 사실을 계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에서가 아닌 야곱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시고 역사 안의 거룩한 일에 그를 쓰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때 가장 근본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반항적인 인간과 그것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다른 면에서는 약점 투성이의 인간일지라도 존재 중심에서 하나님을 열망하며 의지하는 자, 오히려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들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신께서 쓰시는 인간을 더욱더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바른 인간,’ ‘성결한 인간’으로 다듬어 가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결국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인간 중 누가 감히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하나님 외 다른 것에 희망을 걸지 않던 야곱에게 '져' 주셨습니다! “야곱아, 네가 이겼다!”라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야곱의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으며, 열망하며,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져’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져 주신다는 것은, 야곱처럼 하나님을 찾고 열망하는 사람의 ‘원함’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자, 하나님을 열망하는 ‘거룩한 고통’에 참여해 있는 자, 바로 그 사람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시 41:13). ‘야곱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시 114:7; 146:5).

 

   ‘야곱의 영’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새 이스라엘인 교회의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영성(靈性) 중심에 ‘야곱의 영’이 있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은 믿는다고 하면서, 교인이라고 하면서 그 영의 중심에 야곱적인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과 ‘찾음’이 없다면, 야곱적인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없다면, 야곱적인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지’가 없다면 그는 ‘참 이스라엘인(요 1:47)’은 아닙니다. 그는 아마도 여전히 ‘에서’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야곱’을 찾으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해 목이 마른 ‘야곱’을 만나셔서 그를 ‘이스라엘’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야곱 같은 자를 찾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초청이 지금도 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외쳐지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야곱을 주제로 한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찬송으로 이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 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첨부파일 bill.야곱과에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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