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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신앙 에세이들입니다. 읽으시는 중 하늘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영맹의 비극(2) (요 9:1-41)
제목 영맹의 비극(2) (요 9:1-41)
작성자 관리자 (ip:)
  • 작성일 2013-11-06 10: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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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맹의 비극(2) (요 9:1-41)

 

   ‘순수한 것’을 ‘순수하게 누림’은 생명의 법칙입니다. 우리의 허파가 ‘순수한 공기’를 ‘순수하게 누림’은 육체의 생명에 직결된 문제입니다. 우리가 ‘순수한 물’을 정상적으로 마셔 그것의 순수함을 누린다는 것은 생명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또한 식물이 ‘순수한 햇빛’을 청명한 공기에서 받아 누리는 것은 그 식물의 건강에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인간의 영적 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와 진리를 ‘순수하게’ 받아 누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은혜와 진리를 우리에게 생수처럼, 신선한 공기처럼, 또한 단비와 햇빛처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받아 살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하셨는데,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 중 하나가 ‘단순한 겸손’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완악하고 교만한 자는 이것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나면서 맹인인 자의 눈을 뜨게 하신 일, 그것은 어떤 일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햇빛처럼 병든 인간에게 임하고 있던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power)이 치료의 광선이 되어 병을 고쳐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누구든 하나님의 치료와 구원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예수께서 베푸신 ‘치료의 사역’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은혜와 능력을 보면서 “아, 하나님의 능력이 이렇게 위대하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크구나” 하며 감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했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18:43).

 

   하나님에게서 오는 순결한 은혜 앞에서 ‘순수한 찬양’을 한다는 것은 사실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양지의 나무 싹이 하루 분량의 햇빛을 받아 누리면서 더 강건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듯, 갈증에 시달리는 몸이 생수를 받아 생기를 회복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듯, 죄와 악으로 병든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와 진리를 받아 치료되고 새롭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그러한 ‘당연한 일’에 참여하는 것에 실패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료와 구원은 인간을 향하여 열려 있고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 주어지는 은혜를 누리는 일에 실패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실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요한복음 9장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나면서 맹인인 자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맹인의 눈에 침으로 이긴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 씻으라고 하셨고, 그 말씀대로 한 맹인의 눈이 보게 된 것입니다(요 9:6-7). 나면서 맹인인 자의 눈을 뜨게 한 그 주님의 일은 실상 얼마나 엄청난 사건이었습니까? 그 사건은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치료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가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난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의 그 치료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에 대한 긍휼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준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치료의 일을 행하심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큰 놀라움과 감격과 감사와 희망을 심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얼마나 놀라운 구주이신지를 우리가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고 귀한 치료를 우리에게 베푸실 수 있는지를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양지의 나무 싹이 자신에게 내리쬐는 햇볕을 ‘단순하게’ 받아 누리듯,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의 일에 대해 ‘단순하게’ 놀라고, ‘단순하게’ 감사하고, ‘단순하게’ 찬양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쁜 일을 겪는 어린아이가 자신의 기쁨을 ‘단순하게’ 표현하듯이 말입니다.

 

   충격적인 것은 요한복음 9장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에 대한 단순한 놀라움, 단순한 감격, 단순한 감사를 자신들의 마음속에 갖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순수한 것’을 ‘순수하게’ 느끼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는 그들의 마음은 뭔가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었고 너무나 복잡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에 대한 ‘놀라움’을 느끼지 못하던 그들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병적 자기사랑’을 중심으로 한 시기, 증오, 소유욕, 명예욕, 권력욕이었습니다. 그런 오물들이 그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 오물들로 인해 그들의 눈은 ‘백태 낀 눈’이 되어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병들어 느낄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그들은 대단한 상식 밖의 일을 합니다. 그들은 ‘놀라운 일’에 대한 ‘단순한 경탄’은 하지 못하고 대신 눈을 뜬 사람에 대한 ‘조사’와 ‘문초’에 집중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신학적 의미’에 대한 자신들의 기준을 놓고 일어난 일의 전모에 대한 분석과 판단과 심판을 시작합니다. 열띤 ‘신학적 논쟁’도 벌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순수한 은혜’에 대한 ‘순수한 감격’을 느낄 겨를은 없었습니다. 한 불쌍한 맹인에 대한 긍휼과 그의 눈이 치료된 생명의 사건에 대한 축하가 그들의 마음속에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었고, 자신들의 위선을 지적하는 예수에 대한 시기와 증오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안식일 문제’를 논하던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은혜의 주인’께서 나면서 맹인인 자의 눈을 뜨게 한 ‘생명의 일’에 대한 놀라움과 감격을 갖지 못하던 그들, 그러면서 자신들이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는 줄로 알고 있던 그들을 주 예수께서는 ‘영적 맹인’으로 단정하셨습니다(39). 그들은 “우리가 맹인이라니요? 저희 눈은 멀쩡합니다” 하며 예수께 도전하였습니다(40).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 무슨 말씀입니까? 만일 사람이 주님을 향해 “주여, 제 영의 눈이 멀었사오니 보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구하면, 그는 용서와 구원을 받아 살게 되고 영적 시력도 갖추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얼마나 ‘소경’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다 알고 있는 줄로 착각하는 자, 그는 스스로 치료를 거부하고 있는 ‘영적 맹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영적 맹인’이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신학이론은 훤한데 ‘구원받은 기쁨’의 순수한 감격은 중심에 없는 신학자들, 설교는 하는데 막상 자신의 마음속은 ‘십자가에 대한 감격’ 대신 물량적 성공에 대한 동기로 차 있는 목회자들, 교회는 오래 다녔으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순수한 감격은 없이 타성에 젖은 ‘종교생활’에 고착된 신자들, 이 모두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맹’ 문제의 예들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기쁨)이라”고 했습니다(롬 14:17).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어떤 외형적 조건이 아닌 ‘마음속 세계의 영적 풍요’로 말하고 있습니다. ‘의’는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성결을 마음과 삶에 구현하는 문제며, ‘평강’은 주어진 삶의 터전에서 평화를 만들며 사는 능력이며, ‘기쁨(희락)’은 구원자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 은혜에 대한 ‘순수한 기쁨’ 그 자체입니다.

 

   한가지가 분명합니다. 우리가 훗날 하나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거기에서 참으로 빛이 나는 사람은 세상에서 화려한 지위와 학위와 타이틀을 가진 자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낮아질 대로 낮아지어 하늘의 ‘순수한 은혜’를 ‘순수한 믿음’으로 받아 누릴 줄 아는 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고 하신 대로 어린아이같이 되려고 애쓰는 자들이고, 주님이 회개해야 한다고 하신 대로 참 회개를 하려고 몸부림치는 자들이고, 주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고 하신 대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의와 성결을 자신의 마음과 삶에 이루려고 힘쓰는 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심판대에서 빛을 발할 자들입니다. 그들은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주 예수님의 사랑을 더 배우고, 주 예수님의 겸손을 더 배우고, 주 예수님의 온유를 더 배우고, 주 예수님의 지혜를 더 배우고, 주 예수님의 남 불쌍히 여김을 더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이름없는 평신도일 수 있고 이름난 지도자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누군지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맹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거짓과 위선의 삶을 사는 많은 화려한 지위와 타이틀의 지도자들이 “주여, 저희를 모르시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큰일을 한 저희를 모르시나이까?” 할 때 주님은 대답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육신의 눈이 주는 캄캄함과는 비교할 수 없이 무서운 것이 ‘영적 캄캄함’입니다. 어거스틴 (Augustine)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전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자기기만은 영맹의 대표적 특징입니다. 성령께서 ‘깊은 곳’을 찌르시며 지적하시는 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면서도 “나는 보는 사람이다”라고 자신하는 사람, 그가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그는 ‘순결한 은혜’를 보거나 체험할 수는 없습니다. 주 예수님의 놀라운 기도로 이 글을 마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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